5. 조고화두와 반문문자성
어떤 이는 관세음보살의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反聞聞自性) 하는 것이 어떻게 참선이 되느냐고 묻는다. 내가 이제 말하겠다. '조고화두'(照顧話頭)라는 것은 바로 그대로 하여금 시시각각 밝고도 또렷한 일념으로 마음빛을 돌이켜 이 한 생각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그 자리를 반조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문문자성'이라는 것은 바로 그대로 하여금 시시각각 밝고도 또렷한 일념으로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들으라는 것이다. 회(回)는 곧 반(反)이오,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는 것은 곧 자성이다.
들음과 비춤은 바로 흐를 때에는 소리를 따르고 형상을 좇아가지만, 들음은 소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봄은 형상을 넘어서지 못하며 분별이 뚜렷하다. 그러나 거꾸로 흐를 때에는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키게 되어 소리와 형상을 좇지 아니하여, 원래 하나인 정명한 들음과 비춤이며 별개의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른바 '화두를 비춘다'거나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거나 하는 것이 절대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만약에 눈으로 본다거나 귀로 듣는다면 이는 소리와 형상을 좇아 사물에게 부림을 당하는 것이어서 순류라 부른다. 만약에 밝고 또렷하게 빛나는 한 생각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 가운데서 소리와 형상을 좇지 아니하면 이를 역류라 하며, 화두를 비춘다고도 하고,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고도 한다.
6. 생사심과 장원심
참선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사가 눈앞에 닥친 듯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마음(生死心)이 간절해야 하며, 동시에 오래오래 꾸준히 밀고나가리라는 장원심(長遠心)을 일으켜야 한다는 점이다. 생사심이 간절하지 않으면 의정이 일어나지 않으며 공부가 제대로 향상되지 않는다. 그리고 장원심이 없는 것은 마치 하루 볕을 쬐고 열흘 추운 것과 같아서 공부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장원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진정한 의심이 일어나며, 진정한 의심이 일어날 때에는 번뇌를 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쉬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시절이 한번 이르면 자연히 물이 흐르는 곳에 도랑은 생기게 되는 법이다.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실을 이야기하겠다. 청나라 1900년에 8국의 연합군이 북경에 쳐들어 왔다. 그때에 나는 광서황제, 자희태후 일행과 함께 피난을 갔는데, 중간에 사정이 생겨서 도보로 섬서 방면으로 도망치게 되었다.
날마다 수십리씩을 도망갔는데, 며칠 동안 밥조차 먹지 못하였다. 어느 날, 노상에서 한 노인이 고구마 줄기을 쪄서 광서 황제에게 올렸다. 황제는 다 자시고 나자 그 노인에게 "이것이 뭔데, 이렇게 맛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황제는 평소에 상당히 거드름을 피우고 대단한 위풍을 보이며 살았지만, 어찌 일찍이 멀리 걸어 보았겠으며, 어찌 일찍이 반 끼나마 배를 곯아 보았을 것이며, 어찌 일찍이 고구마 줄기 따위를 자셔 보았을 것인가? 그러나 지금은 거드름도 피우지 못하고 위풍도 과시하지 못하면서, 길에서는 뛸 수도 있었고 배도 곯을 수 있었으며 채근도 먹을 수 있었다. 어째서 그가 이처럼 체면불구하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 연합군이 그를 죽이려고 하니 그는 살겠다는 일념으로 도망칠 생각만 한 것이 아닌가?'고.
그러나 뒤에 강화협상이 이루어져 어가가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게 되자 거드름도 피우게 되었고, 위풍도 과시하게 되었으며, 길에서 뛰지 않아도 되었고, 배를 곯지 않아도 되어, 조금이라도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게 되었다. 어째서 그가 이 때에는 맛없는 음식이 안 넘어가게 되었을까? 연합군이 그를 죽이려고 하지 않으므로 그는 살기 위해 도망칠 생각이 없어졌기 때문 아니겠는가?
만약 그가 항상 도망칠 때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일을 해 나간다면 안 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장원심이 없었기 때문에 순경을 만나자 예전의 태도가 다시 싹트게 된 것이다.
여러분은 동참하고 있는가? 무상살귀가 바로 이 순간에도 우리의 목숨을 노리고 있으며, 더구나 저들은 아주 우리와 협상이라는 것은 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선뜻 장원하고도 간절한 마음을 내어 생사를 요달하여 해탈해야 할 것이다.
고봉 원묘 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참선을 함에 있어서 기한을 정해놓고 공부를 이루려고 한다면, 마치 천 길 우물 밑에 떨어진 것과 같이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천 생각만 생각이 오직 벗어나려는 마음 뿐이어야 하며, 끝내 결코 두 생각이 없어야 한다. 참으로 이렇게 애써서 3일, 5일, 혹은 7일에 사무치지 못한다면 내가 오늘 큰 거짓말을 한 것이니, 길이 발설지옥에 떨어지리라"하였다.
저 노스님이 한결같이 자비심이 간절하여 우리가 장원하고도 간절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여 이렇게 다짐을 거듭하고 우리를 위해 보증하신 것이다.
공부의 어려움과 쉬움
공부인에게는 두 종류의 어려움과 쉬움이 있으니, 첫째 초심자의 어려움과 쉬움이요, 둘째 구참자의 어려움과 쉬움이다.
1. 초심자의 어려움과 쉬움
1) 초심자의 어려움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의 보편적인 병통은 망상과 습기가 놓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명과 자기를 앞세우는 마음, 질투, 장애, 탐냄, 성냄, 어리석음, 애착, 나태 등의 마음을 일으키고, 먹기를 좋아하며, 옳고 그름과 남과 나를 분별하고 뱃살만 불린다면 어떻게 도(道)와 상응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부잣집 출신은 습기를 못 버려서 약간의 모욕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벼운 고통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어떻게 공부하여 도를 깨치겠는가? 그들은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떤 신분의 사람으로서 출가하셨는지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얼마 안 되는 문자를 깨우쳐 글귀나 뒤적이며 옛 사람의 말씀을 가지고 알음알이를 일으켜 스스로 대단한 양 큰 아만을 일으키지만, 한바탕 큰 병을 만나면 연신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섣달 그믐 마지막날처럼 임종이 닥쳤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허둥거리지만 평소의 알음알이는 이때에 가서는 한 푼 어치도 쓸데가 없으니 비로소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
얼마간 도심이 있는 사람은 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를 모른다. 어떤 이들은 망상을 겁내어 없애고 없애도 종일토록 번뇌가 끊이지 아니하므로 스스로 업장이 두터움을 원망하고 이로 인해 도 깨칠 마음을 퇴실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어떤 이들은 망상을 맞닥뜨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분연히 주먹을 부르쥐고 기운을 돋구며, 가슴을 내밀고 두 눈을 부릅뜨면서 마치 무슨 큰 일이라도 벌일 기세를 보인다. 결국 망상을 상대하여 한 바탕 사생결단을 내려는 것이나, 망상이 없어지기는커녕 도리어 사람의 피를 토하게 하고 발광하게 한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어떤 이들은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나, 이미 그들이 귀신굴에 태어난 것을 어찌 알겠는가. 비우려 해도 비워지지 않으며, 깨달으려 해도 깨달음이 오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마음으로써 깨달음을 구하지만, 깨달음을 구하거나 성불을 생각하는 것이 모조리 큰 망상임을 어찌 알겠는가. 모래로는 밥을 짓지 못하는 법, 오지도 않을 나귀해가 되도록 구한다해도 결코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한두 가지의 그윽한 향기만 맡고도 곧 환희심을 일으키지만, 이것은 눈먼 거북이가 나무 구멍에 머리를 내민 격으로 우연히 얻은 것이지 참으로 공부가 익었기 때문이 아니며 환희 마구니가 마음에 든 것임을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또 어떤 이들은 고요한 가운데서는 매우 맑고 깨끗하여 공부가 잘 된다고 느끼지만, 움직임 가운데서는 되지 않으므로 시끄러운 곳을 피하여 고요한 곳을 찾는데, 이들은 이미 동정의 두 가지 마왕의 권속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상과 같은 부류는 많고도 많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길을 바로 들어서지 못하면 정말 어려움이 많은 것이다. 깨어있음이 있어도 비춤이 없으면 산란하여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비춤은 있으나 깨어있음이 없으면 죽은 물 속에 앉아 있다가 빠져 죽게 된다.
2) 초심자의 쉬움
공부가 비록 어렵다고는 하나, 일단 길만 바로 들어서면 또한 대단히 쉬운 것이다. 어떤 것이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의 쉬움인가. 무슨 묘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놓아 버리는 것이 그것이다.
어떤 것을 놓아 버릴 것인가? 일체의 무명번뇌를 놓아 버리는 것이다. 어떻게 놓아 버릴 수 있는가? 우리가 장례행렬을 보낸다고 할 때, 그대는 시험삼아 저 시체에다 대고 몇 마디 욕설을 퍼부어 보라. 그 시체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를 몇 대 때려 보라. 그래도 반격하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 심술을 부리던 자도 심술을 부리지 않으며, 평소에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던 자도 그것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 나쁜 습관에 젖어 있던 자도 그것이 없을 것이다. 어떤 것도 분별하지 않고 어떤 것도 놓아 버리는 것이다.
여러분은 동참하는가? 우리의 이 몸뚱이는 숨 한 번 들이쉬지 못하면 곧 시체일 뿐이다. 우리가 놓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다만 몸뚱이를 소중히 여겨, 나와 남, 옳고 그름, 좋아하고 싫어함, 취하고 버림이라는 분별심을 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몸뚱이가 한 구의 시체라는 것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고 그것을 '나'라고 보지도 않을 것인데, 무엇을 놓아 버리지 못하겠는가. 오직 놓아 버려야 한다.
하루 24시간 중 행주좌와를 막론하고 온몸이 통째로 하나의 의념이 되어, 평온하고 부드럽게 끊임없이 의심해 갈 것이며, 한 오라기 딴 생각도 섞지 말라. 일구화두를 마치 천장검을 의지한 것처럼 하여, 마군이 오면 마군을 베고 부처가 오면 부처를 베라. 어떤 망상도 겁내지 말라. 무엇이 그대를 어떻게 하겠는가.
또 무엇을 동(動)과 정(靜)으로 분별하며, 무엇을 집착하겠는가. 공(空)에 집착하면 망상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아서, 망상을 한 겹 더하는 격이 된다. 맑고 깨끗하다고 알면 이미 그것은 맑고 깨끗한 것이 아니고, 공(空)에 떨어짐을 두려워하면 이미 유(有)에 떨어진 것이며, 성불을 생각한다면 이미 마군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물 길어 오고 나무를 해 오는 것이 묘한 도 아님이 없고, 밭 매고 씨 뿌리는 것이 모두 선의 기틀인 것이다. 하루 종일 다리를 틀고 않아야 비로소 공부하고 도를 닦는 것은 아니다.
2. 구참자의 어려움과 쉬움
1) 구참자의 어려움
오래 공부한 사람의 어려움이란 어떤 것인가? 오래 공부했다는 것은 참의심을 현전시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시절이다. 깨어있음과 비춤이 있으면 생사가 있고 깨어있음과 비춤이 없으면 텅 빈 데에 떨어져 버린다. 이 경지에 이르면 정말 어렵다. 여기에 이르러 이 고비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백척간두에 서서 나아갈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경지에서 선정 중에 얼마간의 지혜를 일으켜 옛 사람의 몇 가지 공안을 건성으로 알아채고는 곧 의정을 놓아 버린다. 스스로 크게 깨쳤다고 생각하고는 시를 읊조리고 할하고 고함지르며, 눈을 껌벅이고 눈썹을 치켜올리는가 하면, 선지식을 자칭하면서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마구니 권속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달마 스님의 '밖으로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 헐떡거림이 없어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 가히 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말씀과, 육조 스님의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이런 때 어떤 것이 혜명 상좌의 본래면목입니까?"라고 하신 말씀의 뜻을 잘못 알고서, 마른 나무가 바위에 기댄 것 같이 앉아만 있는 것을 제일로 친다. 이러한 사람들은 신기루를 보배 있는 곳으로 알며 타향을 고향으로 여기는 것이니, 노파가 암자를 불질러 버린 것도 바로 이런 이들을 꾸짖기 위한 것이었다.
2) 구참자의 쉬움
오래 공부한 사람의 쉬움이란 어떤 것인가? 이 때가 되면 오직 자만하지 말고, 도중에 그만두지도 말고 면밀하게 공부해 나가야 한다. 면밀한 가운데 다시 면밀하게, 미세한 가운데 다시 미세하게 해야 한다. 시절이 한 번 도래하면 칠통의 밑바닥이 저절로 떨어질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선지식을 찾아가서 못을 뽑고 쐐기를 빼야 한다.
한산 대사가 노래했다.
높은 산 꼭대기에 올라서니
사방을 돌아봐도 끝이 없구나
고요히 앉아 있으니 아는 사람 없고
외로운 달만 찬 샘에 비치네
샘 가운데는 원래 달이 없으니
달은 푸른 하늘 가운데 있다네
내 노래 한 곡조 불러보노니
이 노래 속의 이것이 곧 선 아닌가.
첫 2구는 홀로 드러난 참다운 실상은 어디에도 일체 속하지 않으며 온 대지에 밝고 밝아 털끝만큼도 걸리는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그 다음 4구는 진여의 묘한 체(體)를 설한 것이니, 범부는 아예 알 수가 없고 삼세제불도 나의 그 자리에는 이르지 못하므로 '아는 사람이 없다' 한 것이다. '외로운 달만 찬 샘에 비치네' 이하의 3구는 한산 대사께서 방편으로 이러한 경계를 비유한 것이다. 마지막의 2구는 사람들이 달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로 알까봐 염려하여 우리들을 일깨운 것이다. 그러니 이 말씀이 모두 선(禪) 아닌가?
결론
나는 이제 비로소 큰 언덕 하나를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이것 또한 어지럽게 얽힌 넝쿨을 펴는 것이요, 길을 갈래내는 일이다. 무릇 언설은 모두 실다운 뜻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스님네들은 몽둥이로 때리지 않으면 고함을 질렀으니, 어찌 이처럼 너절하게 늘어놓는 일이 있었겠는가?
지금 시절이 옛날 같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것일 뿐이다. 여러분은 동참하고 있는가? 구경의 손가락은 누구이며 달은 누구인가? 참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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